2008/05/18 17:44

[책] 청춘의 문장들 잡동사니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가 공들여 전해준 책이다. 책의 지은이 김연수는 친구가 몇 번을 언급해서야 겨우 기억해 낼 수 있을 만큼 내게 별다른 인상이 없던 사람이었다. 90년대 이후 신진 작가들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하고 관심도 없던 탓이었다. 그렇다고 그 전 세대 작가들에 대해 많이 아느냐하면 그건 또 아니지만.

5월 초 처음으로 광우병 반대 집회가 전국적으로 열리던 날, 아직도 학교에 남아 활동을 하는 친구와 함께 서면 바닥에 주저앉았다. 날은 뜨거웠고, 집회는 조잡했다. 주위는 반경 10m 이상이 전부 중,고등학생들이었다. 격앙된 감정으로 정확하지 않은 정보들이 난무하는 집회 한가운데서 나는 지겨움에 받았던 책을 꺼내들어 읽었다.

'청춘의 문장들'이란 제목에 소설가 지망생인 남자친구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라며 전해준 배경이 더해져 사실 젊은 날 운운하는 감상적인 책일 거라 생각했다. 언젠가 어찌하다 참가하게 된 모임에서 소위 작가 지망생이라는 연하의 남학생을 만났는데, 그 친구가 나의 어떤 점에 공감대를 느꼈는지 그 이후로 누나누나 하며 몇 번 연락을 취해 온 적이 있었다. 정작 나는 택시비가 없어 먼저 자리를 뜨지 못해 그 모임이 새벽 3시에 파할 때까지 지겨움에 하품한 기억밖에 없는데 말이다. 어쩐지 어줍잖아 보이던 그 학생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스스로 '작가 지망생'이라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좀 마뜩찮게 보는 경향이 생겼던 것이다. 선입견이란 건 쉬이 고쳐지지 않는 법이다.

책은 작가가 젊은 시절 읽었던 책들의 한 구절을 젊은 날의 한 토막과 연결지어 회상하는 형식이다. 35살, 아이의 아버지, 직장 생활을 하던 시기, 방위병 시절, 소설을 쓰던 시절, 시를 쓰던 시절, 학창시절, 그리고 어린 날들.

처음엔 작가의 경험담과 인용한 구절들 사이의 개연성이 그닥 느껴지지도 않고 특별히 인식의 깊이나 문장의 참신함도 느껴지지 않아 심드렁했다. 딱히 제목에 걸맞게 '청춘'의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니었다. 어린 여학생들은 땡볕 아래 확성기만 갖춘 빈약하기 짝이 없는 시위 현장에서 우리 오빠 어떡해요 운운하며 울고 있었고 친구는 방송국 카메라를 부르러 간다며 이미 내 옆자리를 떴다.

그러다가 '그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의 한 대목에 찡해졌다. 몰락해가는 고향 거리에 돌아와 아버지가 운영하던 중국집을 이어 망해먹은 진씨 아들에 관한 이야기. 위태위태한 오기. 가진 것 쥐뿔 없어도 꼬장꼬장한 오기로 나락까지 굴러가는 사람들. 작가가 짚어낸 청춘의 한 대목이 그것이라 좋았다. 별 것 아닌 것에 오기를 부리는 사람들, 그게 대의명분 따위의 거창한 것이 아니고 또, 사랑 어쩌구하는 낭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좋았다. 그렇다고 청춘이란 허울의 밑도 끝도 없는 쾌락과 퇴폐에 관한 것도 아니라 좋았다. 장인정신까지는 가지도 못할 그런 고집. 병이 될 정도로 어떤 대상에 빠지는 벽(). 그리고 작가가 소설에 대해 가지는 벽이 곳곳에 보여 좋았다. 이 사람은 글을 대단하게도 허술하게도 보고 있지 않구나,하는 생각에 글에 신뢰가 갔다. 

윤치호의 집을 방문한 여학생, 르네상스의 DJ 인혁, 학교 앞 만화방의 아르바이트 할아버지, 원당 시내 떡볶이 집의 아가씨를 짚어내는 시각이 마음에 들었다. '분단 사상 처음으로 북한 지역에서 열리는 남측의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그의 감회도 재미났다. '이시바노 히데노'의 하이쿠도 와 닿았다. 얼마전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각나서. 도박 신고를 받고 들이닥친 경찰에게 차라리 잡아가라고 외치는 청춘들이어서, 지나가던 돌팔이 스님의 한마디에 딛고 일어서는 청춘이어서 공감이 갔다.

지금의 내게 청춘이라 부를 어떤 시기를 짚으라 한다면 아마도 대학시절부터 임용된 첫해를 꼽을 거다. 그 때만큼 낯설고 새로운 것들에 그토록 긴장하고 벌벌 떨며 부딪친 시기가 없는 것 같아서이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어느 날은 너무나 크고 대단해 보이다가 한순간에 더할 나위 없이 보잘 것 없고 하찮은 것들로 가라앉곤 했다. 허세와 자학을 오가며 맨 몸으로 버텨냈던 그 순간들, 세상은 참으로 낯설고 아득했다. 그 시기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금은, 물론 지금도 청춘 진행중이라 생각은 하지만, 그 시기만큼 세상이 아득하진 않아졌기 때문이다. 월급과 공과금과 일정하게 돌아오는 휴일과 방학들로 짜여진 일상에서 그닥 벗어나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감상적인 책이지만, 그 감상이 그닥 나쁘지 않았다. 신파도 아니고, 후회도 아니고, 애잔하고 따뜻한 연민 같은 것이 있었다. 그 시절 사람들에 대한, 그 시절 자신에 대한. 나와 연배 차이가 많이 나는 것도 아닌데 그가 가진 젊은 날의 독서력과 경험들도 부러웠고. 무엇보다 나는 조곤조곤 재치있게 글 쓰는 사람들이 좋다. 그가 전해주는 젊은 날의 여러 편린들이 청춘을 보냈던, 그리고 보내고 있는 내게도 뒤를 한번쯤 돌아보게끔 하는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여전히 삶이란 내게 정답표가 뜯겨나간 문제집과 비슷하다.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는 있지만, 그게 정말 맞는 것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집회는 어이없이 마무리가 됐고, 아직도 쨍쨍한 땡볕 아래서 나는 우연히 마주쳐 집회 자리에 같이 앉아 있던 낯익지 않은 후배들과 허둥지둥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울고 불고 하던 이들도 순식간에 흩어졌다. 그 아이들도 언젠간 이 자리를 청춘의 한 자락으로 기억하겠지. 내가 대학 시절 땡볕 아래 집회하던 기억을 밑천 삼아 지금 여기 나와 앉은 것처럼, 이 애들도 나중에 그럴 수만 있다면 울고불고 짜는 감정의 낭비도, 격앙된 정보의 선동적 냄새도 그닥 나쁠 것이 없다. 그리고 청춘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겐 이 한마디면 될 듯 하다.

즐거워하되 음란하지 말며 슬프되 상심에 이러지 말자.

'이러지 말자'는 자각만 있다면, 청춘은 어떠한 모양새라도 좋다. 그럴 수 있는 유일한 시절이다.




덧// 이 책을 전해준 친구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덕분에 좋은 작가를 한 사람 알았다. 사람을 통해 한 사람의 인식의 장이 넓어진다는 건 우주만한 감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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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세리 2008/05/21 11:45 # 답글

    우리의 만남은 언제에 이루어지는 것일까?^^
    5월말에 행사가 있어서, 6월 초에 꼭 보자~^^
  • zzam2 2008/05/22 17:46 # 답글

    요즘 많이 바쁘죠?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크크~
    6월 5일 우리 개교기념일인데.. 평일이고 하니 한산하게 보면 좋을 거 같아요.
    연락할게요^^
  • 평상심 2009/05/11 01:21 # 답글

    여기에 글을 남겼었군. 그래서 더 익숙했나보다~^^
    간만에 참 맘에 드는 책이었다.
    너도 참 글 잘썼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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