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14 22:58

[책] 마이너리그 잡동사니

은희경씨 책은 대학 다닐 때 읽은 '새의 선물'이 전부다. 무척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난다. 새침하고 조숙한 어린 '나'와 철딱서니 없는 이모의 쌉싸름한 성장기. 그런데 어째 그 뒤로 그녀의 책에 손이 가질 않더라. 재미는 있었으나 특별한 울림을 갖고 되찾게 만드는 책은 아니었던 듯.

다시 그녀의 책을 찾아 읽은 건 한 연수에서 직접 만났기 때문이다. 마이크를 잡고 앉은 그녀는 나이보다 훨씬 젊어보였고 생기발랄했으며 유쾌했다. '새의 선물'의 꼬마처럼 어딘가 시니컬하고 제 잘난 맛에 살 사람이라 생각했었는데 예상을 완전히 빗나간 셈이다. 자신의 별명이 '개그소녀'라 소개하며 애교 있게, 붙임성 있게 웃음의 미학에 관해 이야기하는 그녀에게서 순수함과 천진함이 묻어났다고 하면 나보다 연상인 이에게 예의가 아닌 걸까. 유복한 집안에서 밝고 사랑스럽게 자라나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에 대한 동경을 가진 나로서는 은희경씨가 그에 꼭 부합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새의 선물'을 읽고 가진 선입견은 나의 오판이었나 확인하고 싶어 다시 그녀의 책을 찾았다. 굳이 '마이너리그'인 이유는 학교도서관에 있는 그녀의 책들 중 그나마 익숙한 제목이어서.

일단 킬킬거리며 웃게 만드는 그녀의 재치 넘치는 문체가 인상적이다. '새의 선물'도 그러했던가?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무심한 척 쏘아대는 위트가 책에서 손을 뗄 수 없게 한다. 시험기간이라 상대적으로 시간 여유가 많았던 탓도 크겠지만 읽기 시작하면 놓을 생각이 들지 않게 만드는 것만은 틀림없다. 상황은 평범한데 풀어내는 그녀의 필담이 쉬지 않고 웃음을 만들어 낸다. 반면 유머를 위해 그녀가 상당히 의식하고 고심하여 배배꼬아놓은 문장들이 때로 거슬릴 때도 있다. 그래서 화려한 말놀음이 끝나면 문득 허무해지는 기분도 들고. 개인적으로는 '미겔 스트리트'식의 상황이 자아내는 웃음이 더 취향이다.
 
주인공은 만수산 4인방, 가오잡는 두환, 허풍선에 열정만 과한 조국, 얼굴만 곱상한 승주, 천재가 되고 싶었으나 수재도 되지 못하는 나, 형준이다. 고교시절 앞뒤자리 짝으로 만나 숙제 안한 패거리로 함께 묶인 이후로 인생이 세트가 되고 말았다. 전혀 어울리지 않고 서로 어울리고 싶어하지도 않는 넷이 만수산 드렁칡이 얽히듯 얽혀 들어간다. 그들의 인생도 만수산 드렁칡처럼 그냥저냥 얽혀 굴러간다. 마이너리그의 삶 안으로.

특별히 잘난 것 없는 네 사람. 그렇다고 지나친 비관이나 턱없는 희망에 목매지 않고 소소하게 살아가는 소시민들. 하루하루 즉흥적으로 대충대충 무마하며 살고 그렇게 그럭저럭 늙어가는 이들. 시대에 비껴서 있지만 어쨌거나 시대에 희롱당하는 사람들. 그렇기에 책을 읽다보면 도대체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는 이 네사람에게 연민을 느끼고 그들의 삶을 돌이켜보게 된다. 한바탕 꿈처럼 뒤뚱거리다 푹, 꺼져버리는 거품들. 대부분의 삶은 결국 저런 것이라는 씁쓸한 자각. 한바탕 웃고 난 뒤라 그런지 그 씁쓸함은 유독 여운이 길다. 

그녀가 강연에서 자신의 입으로도 밝혔듯이 그녀는 익숙함을 비트는 개그에 삶의 진실이 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진지함, 무거움, 심오함, 삶의 진실은 그런 게 아니다. 속되고 저속하고 유치찬란한 것들이 오히려 삶의 본질이다,라고. 그런 그녀가 메이저리그가 아닌 마이너리그에 초점을 두는 것은 당연할 게다. 허나, 메이저가 아닌 것들에도 수많은 양상이 존재한다. 그녀가 선택한 마이너리그는 그 중에서도 가볍고, 얄팍하며, 저속한 것들이다. 그녀가 젊은 날 지내온 시대의 진중함에 대한 반작용일까, 혹은, 시대의 진중함에 함께 하지 못한 자의 자기방어일까. 최고가 되지 못할 바에야 최선을 다하지 않음으로써 자존심을 지켰던 형준처럼 진중하지 못할 바에야 진중하지 않음으로써 자존심을 지키는 꼴이랄까. 어찌되었든 가벼움과 유머가 그녀의 모토라면 그것으로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하지 않았을까? 반어와 역설로 온통 삶을 붕붕 띄워놓고 덧붙이는 말들은 그녀의 저의가 무엇인지 갸웃거리게 만든다. 

그러는 동안 우리 모두 공평하게 사십을 넘겼다. 만수산 드렁칡. 삶의 여정이란 것이 사실로도 칡처럼 하잘것없는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이었음을 깨달을 만한 나이가 된 것이다.

산에 한번 가봐. 전나무숲, 대나무숲, 소나무숲, 이름은 그렇게 붙이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전나무 대나무 소나무 입장에서만 본 거지. 사실 숲을 울창하게 만드는 것은 이끼 같은 거, 그리고 드렁칡 같은 하찮은 식물이더라고. 

만수산 4인방의 삶이 공감을 자아내는 것은 분명하지만, 둘 중 고르라면 전나무, 대나무 아닌 이끼에 드렁칡임에 동의하지만 그들이 숲을 울창하게 만든다는 것에 고개를 끄덕이기는 쉽지 않다. 인생이 한 편의 소극이며 4인방이 더할나위 없는 코미디의 주연배우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음은 인정하겠으나 소극이 소극으로써 완성도를 높이려면 저런 언급은 빠져야 마땅하다. 형준을 제외하고는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이 칡처럼 하잘것 없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음을 깨닫는 이도 없고, 그들 모두는 메이저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경박함 어디에 숲을 울창하게 만드는 역량이 내재되어 있다는 건지. 작가의 자가당착이다.

내가 끌고 가는 삶의 시간이 불현듯 가시처럼 목구멍을 깊숙이 찔러왔다.

더구나 소설의 마지막의 저 구절은 사족을 넘어 소설 전체를 허망하게 만든다. '나'로 등장하는 형준은 시종일관 냉소적이며 삶에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인물이나 그럼에도 속물적 욕구를 누구 못지 않게 지니고 있다. 단순무식한 두환, 조국, 승주와 다르게 형준이 만들어 내는 웃음 코드는 이율배반적인 그 모습에 의한 것이다. 그런 그가 생뚱맞게 삶을 진지하게 반추하는 듯한 문구로 소설을 마무리하다니 작가 자신이 스스로 글쓰기 방식을 뒤엎는 건가. 차라리 형준의 속물적 근성을 드러내며 마무리했더라면 소설이 가벼움 뒤편에 진중한 칼날을 벼리게 되었을거다. 어찌해서 굳이 진지함을 드러내는 문구로 자신의 글을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건지. 그녀의 개그는 진중함에 대한 유아적 반항심은 혹 아닌가, 다시금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경박함도 분명 삶의 한 양태다. 그것을 부정할 필요도 무시할 이유도 없다. 허나 경박함을 경박함 자체로 보려하지 않고 의식적으로 지어내거나 무언가의 대항마로 위치시킬 때 구차함이 생긴다. 소설의 가벼움이 휘발성으로 끝나는 느낌을 받는 것은 소설의 유머코드 때문은 아닐 것이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 때 국어교사였던 그녀가 묘사하는 교육현장도 눈에 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들로 도배되어 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정도 인식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나 할까. 그녀는 안전한 곳에서 한 발 물러서서 더러운 것들을 더럽다 말하는 것에만 머무는 것은 아닌지. 같은 의미로  마이너들의 삶을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서서 마이너로 묘사하는 것에만 머무는 것은 아닌지. 진중함이 아닌 가벼움, 메이저가 아닌 마이너를 바라보는 것, 거기에서 멈추는 것. 혹, 그녀가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이 그 정도인 것은 아닌지 조금 의심이 들었다. 물론, 그 정도로 만족한다, 더 깊이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거다. 그런 소설도 분명 필요할 테니까.

허나 나로서는 은희경씨의 소설을 내가 오랫동안 잊고 지낸 이유가 저런 탓은 아닐는지, 다시금 그런 생각을 하게끔 했다. 그리고 드는 또 하나의 의문, 정작 작가 자신은 메이저일까 마이너일까. 뭐, 그런 편가르기가 쓸데 없고 고루한 진중함이라 하면 할 말 없다만 빌미는 작가가 제공했다고. 제목에다 저렇게 떡하니 붙였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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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선미 2009/05/19 16:14 # 삭제 답글

    올만에 출근했다가 딴짓하러 와봤어-_-;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혀산단 표현을 보고 와 이거 괜찮은데 했다가, 니 서평을 보니, 그게 내가 생각했던 뉘앙스가 아니란걸 알고 어쩐지 김샜다.ㅋㅋ 나도 새의 선물 넘 재밌게 봤었는데 그 이후로 은희경꺼 안봤어. 혹여 새의 선물보다 못하면 실망하자나 ㅋㅋㅋ
  • zzam2 2009/05/20 20:46 # 답글

    드디어 댓글을 달 여유가 생겼구만. 워킹맘의 고달픈 생활을 잘 헤쳐나가길~
    써 놓고 보니 굉장히 비판적인데 사실 읽을 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어. '재미'는 보장함.
    '재미' 뒤에 무엇이 남는가가 문제지. 가볍게 읽기 참 좋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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