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6/01 01:04

[책] 구운몽 잡동사니

곧 수업을 하게 되는데, 정작 구운몽 작품 전체를 읽은 적이 없다. 예전엔 학문의 대상으로, 혹은 시험을 위해, 지금에는 가르칠 텍스트로 대하는 구운몽은 한자와 고문이 뒤섞인 골치 아픈 작품이다. 교과서에 실린 짤막한 부분만 봐도 한자어가 빽빽하게 눈을 가리어 저절로 책장을 덮게 만드는 묘한 위용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한번은 읽어야지, 양심이 있다면.하는 생각에 도서관에서 빌려 열심히 읽었다. 그런데, 정작 책을 펴들자 열심히 읽으려 애쓸 필요가 없다. 이거 정말 재미있다.

읽다 보면 내가 그동안 배워왔고, 가르쳤던 것이 혹 거짓은 아닐까, 아니 거짓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분의 확대해석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줄거리를 따로 정리할 필요가 없을 만큼 대한민국의 고교과정을 이수한 이는 누구나 아는 구운몽. 세속의 부귀영화가 덧없음을 깨닫고 불도에 귀의하는,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주제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허나 이 작품의 어디가? 수백쪽에 이르는 이 긴 소설 중 첫머리, 성진이 육관대사에 의해 속계로 쫒겨나는 부분과 제 4권의 마지막, 양소유가 다시 육관대사를 만나 불법에 귀의하고 득도하는 2~3장을 빼면 나머지는 모조리 양소유의 연애사다.

15살에 진채봉을 만나 백년가약을 맹세하고 16살에 기녀 계섬월과 첫날밤을 치른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 장원급제하여 대승상에 오름은 물론이요, 귀족 가문의 정경패, 그녀의 시종 가춘운, 기녀 적경홍, 무려 황제의 누이 난양공주 소화, 자객 심요연, 심지어 동정 용왕의 딸 백능파까지 그에게 애정공세를 퍼붓는다. 이 곱상하며 악(樂)에도 능하고 머리도 좋으며 무공도 뛰어나고 아마도 밤일도 출중한 양소유에게 거칠 것이 무어랴. 투기의 투자도 모르는 2처 6첩을 거느리고 대승상의 지위에 올라 태평성대를 누리다 문득 인생무상을 깨닫는 소설이라니 뻔뻔함도 이런 뻔뻔함이 없다.

우리말로 문학함의 중요성을 설파한, 거룩한 조선의 유학자이자 문장가인 그 김만중이 진정 작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소설은 연애에 대한 남성, 여성의 욕구를 노골적으로 서술한다. 조선 시대 작품답게 여성의 자기비하적인 표현이 곳곳에 노출되긴 하지만 구운몽에 등장하는 8명의 여인 모두는 자신의 애정에 솔직하고 적극적이며 심지어 양소유를 속이고 놀리는 것에도 과감하다. 양소유 역시 그녀들에게 관심을 드러내고, 수작을 걸고, 서로 희롱하기를 전혀 저어하지 않고 기꺼이 즐긴다. 관직에 나아가고 전투에 임해 공을 올리는 것조차 그 과정에서 여인들을 만나고 그녀들을 얻기 위해 설정된 장치에 불과하다. 이쯤되면 불제자 성진이 앞뒤로 등장하여 일장춘몽 어쩌고 하는 건 김만중이 자신의 뻔뻔함에 대한 면피용으로 슬그머니 갖다붙인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다.

물론, 중간중간 삽입된 시와 인용된 고문들에서 평범한 필부가 적당히 지어낸 이야기는 아니라는 걸 충분히 알 수 있다. 귀양간 사대부의 짓궂은 시간 죽이기일까. 아니면, 원했지만 누릴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한 자기나름의 결별의식일까. 홀로 계실 모친을 위로할 목적으로 하룻밤만에 지은 작품이라 전해지지만 과연 이것을 양반가의 여인, 그것도 자신의 모친에게 보일 법한 작품이라 할 수 있을까. 집필 동기야 작가 본인만이 알 터이지만 당시 고매한 양반네들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어 유쾌했다. 김만중이라는 인물에 대한 평이 양분된다 하니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인식을 당대 사대부들 전체로 확대시키는 것이야 무리가 있겠다만 어쨌든, 이런 생각을 가졌던 양반도 있었다는 거 아닌가.
그리고 이 뻔뻔하고 재미난 연애소설에서 그토록이나 심오하고 무거운 의미들을 추출해내다니 과연 학자란 아무나 못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도 더불어 든다.

읽으며 킥킥대다 못해 푸하핫,하고 웃음을 터트리게 만드는 부분이 한두군데가 아니지만 그 중 재밌고도 어처구니가 없었던 부분을 소개해 본다. 잘나고 멋지고 어여쁜 인물들의 애정의 향연, 그 묘사의 뻔뻔함에 빠져 보시길.

소유가 여쭙기를,
"제가 감히 자랑하려 드는 게 아니라, 이번 봄 과거는 제 주머니 속 물건과도 같으니 염려 마시고, 다만 평생의 바라는 바가 있어서 그 처녀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서는 구혼할 생각이 없으니, 이모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셔서 제가 그 처녀를 한번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너 그거 자랑 맞잖니. 소유는 겨우 16살에, 작년엔 난리를 겪고 거문고와 퉁소 배우느라 시간이 없었을 텐데 어찌 저리 자신만만할꼬. 게다가 소설엔 공부하는 모습따위 한 줄도 묘사가 안되어 있건만. 과거를 코 앞에 두고 이모님에게 여자 소개시켜 달라고 보채는 얼굴 두꺼움이라니 너 좀 최고다.

드디어 용녀와 함께 잠자리에 드니 그 아름다운 정이 굳고 두터웠다. 그런데 날이 채 밝지 않아 별안간 우레 같은 소리가 다급하게 일어나 수정궁전이 흔들려 마치 키로 곡식을 까부르는 듯하였다. 시녀 하나가 급히 아뢰기를,
"큰일났사옵니다. 남해태자가 무수한 군사를 거느리고 맞은편 산에 진을 치고 양 원수와 자웅을 가리자고 하옵니다."
라고 하자, 용녀는 상서를 깨워 말하기를,
"소첩이 처음에 낭군께서 여기 머무르시는 것을 말린 것은 이 일을 염려했기 때문이옵니다."
상서는 크게 화를 내며,
"그 망나니가 어쩌려고 이렇듯 무례한가?"
라고 말하고는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서 말을 타고 물 밖으로 솟아올랐다. 남해 군사들이 백룡담을 에워싸고 있는데 상서는 삼군을 지휘하여 남해태자와 대진하니, 남해태자는 말을 타고 땅을 울리며 진두로 내달아 상서를 꾸짖기를,
"양소유가 사람의 인연을 방해하여 남의 혼사를 파하고 남의 아내를 겁탈하니, 맹세컨대 너와 한 하늘 아래 서지는 않겠다."
라고 외치자, 상서 또한 말을 달리며 크게 웃고는 말하기를,
"동정의 용녀 태어날 때부터 나를 따르는 것이 하늘이 정해 준 인연이니, 나는 단지 천명을 순종할 뿐이니라."
라고 하였다.
태자가 크게 노하여 모든 도적들을 몰아 상서를 잡으라 하여 이 제독과 별 참군이 기운을 돋우고 내달아 달려드는데, 상서는 백옥 채찍을 한 번 드니 진중에서 일만 대군이 함께 일어나 남해군사를 물리치는데 패한 병사들과 쇠잔한 갑옷이 눈 내리는 듯 땅을 가득히 덮었다.


박장대소, 파안대소한 부분. 뻔뻔함도 이 정도면 하늘이 정해 준 재주이니, 나는 단지 천명에 따라 웃다 기절할 뿐. 전쟁 중에 아름다운 여인을 끼고 잠자다 깨어나 망나니라고 버럭 화내고 물 속에서 솟아오르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라. 대체 어떻게 솟아오르는 걸까? 물에 안 젖나? 도술로 투명막이라도 쳐놓은 걸까? 다 자라서 파워레인저의 변신, 전투 장면이나 피구왕 통키의 불꽃슛을 보는 것만큼이나 손발이 오그라든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웃긴다. 부정적 의미가 아니라 입담좋은 허풍쟁이의 유쾌한 만담 한판 들은 기분. 꼭 한번들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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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선미 2009/07/01 12:46 # 삭제 답글

    니 글만 봐도 웃긴다.ㅋㅋㅋㅋ 실컷 놀거 다 놀고 즐길거 다 즐긴 담에 늙어서 불도에 귀의하면 떙~ 인 것인가. 이것은 마치 할거 다 한담에 하나님 믿슙니다~ 하고 죽으면 천당가는게 생각나는 대목이다.ㅋㅋㅋ 더워서 체력이 더 소모되는구만. 곗돈으로 XX주는 먹었느뇨?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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