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구 문화의 근원, 젖줄, 뼈대, 뭐 여튼 그러한 그리스 로마 신화. 온갖 인문사회예술과학 분야에 언급되지 않는 곳이 없는 인간 정신의 원형. 그런데 정작 나는 읽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동안 지속적으로 무언의 자책감에 시달려왔다. 그런데도 손에 잡기가 쉽지 않더라. 내용은 빤할테고 이름들은 길고 복잡할테고 읽고 나면 금세 잊어버릴테고.
그래서 좀 가볍게 읽으려고 골랐다. '길 위에서'라는 부제대로 일상에서 찾아낸 신화라고 하니 좀 더 친숙하고 편하게 읽겠지 싶어서. 근데 너무 가볍게 읽었나. 한참 지나서 독후감을 쓰려니 기억이 안 난다.
다시 책을 들춰보니 백화점 장식에 자주 쓰이는 풍요의 뿔의 기원에서 간다라 미술에서 보이는 그리스 문화의 흔적, 약손 성처녀 마리아에서 거슬러올라가는 약손 아스클레피오스, 누드의 기원 니오베의 딸, 뮤지엄의 어원이 된 예술의 신녀 무사(mousa), 여기저기 막 쓰이는 뱀, 아프로디테, 인간의 고독한 숙명을 보여주는 다나오스까지 종횡무진 훑고 있다. 종횡무진. 그래서 기억이 흐릿했나보다. 다시 보니 저술과 편집에 체계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내용은 재미있다. 대화체로 서술해서 술술 읽히고, 쉽고 편한 단어로 상세히 설명하고 있어 이해도 어렵지 않다. 다만, 길 위, 즉 일상에서 마주치는 것들과 신화와의 연결고리를 찾으려 했다는 책의 목적에는 별로 부합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책의 첫번째 꼭지, 백화점에 장식된 풍요의 뿔 말고 나머지 꼭지들의 주제는 길 위에서 흔히 접하는 것들이 아니다. 일상에서 흔히 보는 물건, 상징들과 신화와의 관계를 드러내 보일 줄 알았는데 풍요의 뿔과 뱀에 대한 것 외엔 그저 외국 문화재나 예술품들의 배경이 된 신화를 언급하는 것들이다. 미술관에 가거나 박물관에 가거나 아님 유럽이나 가야 만날 수 있다. '유럽 길 위에서 듣는'이라고 했어야 옳다.
신화가 우리 일상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그것이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며, 먼 타국이 아니라 이 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이리라 여겼는데 읽고 나면 그것은 이 곳에서 있지 않고 현재와도 별 관련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좀 아쉽다. 그저 교양의 한자락일 뿐.
꼭지별 분량 안배도 들쑥날쑥이고, 일상에서 접하기 어려운 것들에, 무엇에 대한 설명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관련 신화가 이것저것 뒤섞여 설명되고 있어서 재미있고 쉽게 읽되, 읽고 나면 정리가 잘 되지 않는다. 물론 이건 내 머리가 나빠서일 수 있다.
얇지 않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사진 자료도 상세하고 쉽게 쓰여져 금세, 즐겁게 읽었다. 헌데 읽어도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해 더 많이, 새로이 알게 되었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아쉽고나. 그냥 그리스 로마 신화를 완독해야겠다.
+ 너무 험담만 했나. 기대한 내용이 아니라 실망했나 보다. 재미있게 읽었는뎁...
그리스 로마 신화에 관심이 있고, 그것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들을 알고 싶은, 적당히 가볍고 시간 보내기 좋은 책을 찾는 사람을 위한 것으로는 아주 적당하다. 대중적 교양서로는 딱 좋다.
at 2009/06/21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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