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에서 1정 연수를 받게 되었는데, 뭐 이리 하라는 게 많은 거냐.그래, 과제의 의도는 알겠다.
자신의 수업 동영상을 찍어 분석안과 지도안 약안을 제출하라. 7차 교육과정 국어과 교과서의 한 단원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라. 제시한 도서 중 한 권을 읽고 교육적 시사점을 담아 감상문을 작성하라.
그리고 한 달의 과제 제출 시한을 주었다. 한 달이면 넉넉하다 생각한 것이겠지. 허나.
아침 7시 10분까지 출근해서 3일에 한번씩 밤 10시까지 야간자율학습 감독을 하는 데다, 마침 사전 과제 수행 기간은 기말고사 출제와 1학기 수행평가 마감과 빌어먹을 교과부가 2010년 11학년 교육과정 편성에서 도교육청 지정교과를 없애 학생, 학부모 교육과정 선택 설문과 문이과 선택 마감을 동시에 해야 하는 시기였다. 거기다 성적 마감에 가정통신문 작성에 1학기 생활기록부 기록 및 점검에 사정회 준비가 겹쳤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수업 준비와 담임 업무와 학생 관련 일 등 그 외 온갖 잡다한 부스레기들은 말해 무엇하리. 게다가, 좀 챙피하게도 난 일 속도가 느린 편이다. 글 읽는 속도도, 쓰는 속도도 무지 느리다. 학생들이 애써 써서 제출한 수행평가 독서록을 하나하나 읽고 코멘트를 다는데,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전부 다 달아주지도 못했다. 이 빌어먹을 관료주의 행정의 절정판인 도시의 거대 학교는 교사가 제 수업을 준비하고 수행하고 평가하는데 오롯이 시간을 쓸 여유를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시골의 소규모 학교는 사정이 나으냐면 것도 아니지만.) 게다가 나처럼 금요일, 토요일 시간을 쪼개어 개인적으로 여러 연수나 강의를 들으러 다니는 사람은 더더욱 그렇다. 그런 여유는 말 그대로 막대한 지장을 감수하고 벌이는 모험이 된다. 아, 열받아.
그 와중에 읽은 '교사와 학생 사이'. 읽고 교육적 시사점을 쓰랜다. 오냐, 써주마.
교사와 학생 사이가 인간적이며 인도적이며 평화적이 되려면 교사와 학생이 지금보다 덜 마주쳐야 합니다. 교사 100여명과 학생 2500명을 하루 15시간씩 좁다란 건물 하나에 밀어넣어 두면 아무리 인간적이며 인도적이며 평화적인 사람이라 할 지라도 비인간적이며 비인도적이며 비평화적인 사람이 됩니다. 게다가 한쪽은 머리 길이가 3cm가 넘는지, 교복 안에 반팔 티셔츠를 입진 않았는지, 야자 시간에 책을 읽지는 않는지 끊임없이 감시해야 하고 한쪽은 공놀이도 하지 말라, 잠 와도 졸지 말라, 방석깔고 앉지 말라는 소리를 끊임없이 들어야 하면 이건 뭐, 같이 미쳐버려라라는 소리밖에 더 되겠습니까? 참, 이 와중에도 돌아버리지 않고 견디는 내가 대견할 뿐입니다.
대한민국 교육은 교사가 아이들의 말에 귀기울여 주고 아이들의 의견을 존중해 주고 아이들이 스스로 깨닫고 변화할 때까지 기다려주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 교사는 무능한 교사가 됩니다. 대한민국의 유능한 교사는 Neis와 종이문서로 이중기록하는 쓸데 없는 짓을 척척 해내고 애들을 몽둥이로 퍽퍽 후려잡고 달달 볶아 성적을 쑥쑥 올리는 사람입니다. 애들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획일적인 모습으로 만들어 앉혀 찍소리도 나지 않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학부모들의 인식도 별반 다르지 않은지 걸핏하면 학교로 애들이 야자시간에 소란합네, 수업시간에 자네 하는 항의 전화를 걸어옵니다. 어째서 애들 힘만 들고 집중 안되는 야자 없애라, 9교시까지 진행되는 무리한 수업 일과 줄여라라는 항의 전화는 없을까요.
그 와중에 애들은 밤 10시까지 야자를 하고 그리고 또 학원엘 갑니다. 참, 그러고도 쓰러지지 않는 애들이 대견합니다. 이 철인같은 교사와 학생들을 보고 있노라면 어떤 의미로 대한민국의 미래가 밝기는 참 밝구나 하는 쓴 웃음이 나옵니다. 다들 인내력 하나는 무쇠심줄 같습니다 그려.
교과에 대한 교사의 권한은 전혀 보장받지 못하고 학생지도에 교사 개인의 가치관이 개입할 여지도 없습니다. 일제고사 그거 안봐도 된다, 했다가 짤리는 판국 아닙니까. 시국선언, 그것 좀 했다고 난리부르스를 춥니다. 그것을 중립성, 객관성이라 부르며 좋아라 합니다. 교사는 상부의 지시사항을 그대로 학생에게 투영하는 규제장치일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책이 싫습니다. 교사의 인도주의만 강조하는 책. 교사와 학생의 상호작용에만 초점을 두고 개선을 요하는 책. 물론, 그것이 매우 중요하며 실제 교육의 가장 핵심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교육의 본질인 학생과 교사 사이의 의사소통이 이미 외부적 교육 환경에 의해 파괴적일 수밖에 없도록 조성되어 있습니다. 그 교육 환경은 무시한 채, 교사의 역할론과 책임론만 강조하는 이 따우 책에는 질려버렸습니다. 하루 15시간씩 수많은 일들을 해치우며 수십명의 아이들을 향해, 너의 생각은 어떠니? 어떻게 하길 원하지?라고 웃는 얼굴로 친절하고 인내심 있게 물어봐 줄 교사가 과연 얼마나 존재할까요? (없다고 말하진 않겠습니다. 그 와중에도 훌륭히 해내는 소수의 선생님들이 계십니다. 허나 소수의 성공자와 다수의 실패자를 배출하는 제도는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하루 15시간을 꼼짝 없이 앉아 일방적으로 듣기만을 강요당하는 아이들이 자신의 욕구를 정확하고 예의바르며 교사의 요구사항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표출하는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병신같은 교육제도를 뜯어 고치지 않는 한, 이런 책을 아무리 많이 아무리 다양하게 읽혀도 대다수의 교사가 대다수의 학생들과 인간적이며 인도적이며 평화적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며 가르치고 배워나가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라고 똑같이 쓰진 않고 좀 다듬어 썼다. 줄줄 늘리고 늘려서. 5장을 채워야 했거든.
이 병신같은 교육제도에 병신같이 복종하고 있는 내가 정말로 병신 같아서 진심으로 짜증나는 날들에 이런 글까지 쓰라고 하니 정말이지 짜증이 치솟는다. 이 울화를 어떻게 터트려야 좀 생산적일까.
+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을 폄훼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지적이 많고 도움이 되는 처방도 많다. 특히 초등생을 중심으로 쓰여진 거라 초등학교 샘들이 보면 많은 도움이 될 듯.
++ 모든 학교가 다 저렇진 않다. 그러나 사실 대한민국의 학교는 대동소이하다. 중학생도 방학 보충 수업을 하고 초등학생이 오후 자율학습을 하는 판국이니. 어휴.
at 2009/07/21 23:58


덧글
이영주 2009/08/03 17:52 # 삭제 답글
막 1년 된 신참 기간제 선생이 지나가다 속 시원해서 한 줄 남기고 갑니다.zzam2 2009/08/04 22:19 # 답글
이렇게 허공에다 대고 외칠 게 아니라 행동으로 무언가 바꾸어야 할텐데... 쉽지 않네요.갱 2009/08/26 00:12 # 삭제 답글
근황이 계속 궁금했는데...나도 사는 게 바빠서 연락을 못했네.
연락이 뜸해도 늘 변함없이 반갑지만~
나 이 책 읽었다. >.< 뭐.. 비슷한 감상이었다만...
블로그 바꿨다. 홈피 없앤 이후에는
계속 다이어리에 끄적대기만 했는데...
아무래도 블로그는 하나 있어야
좀 든든하겠다 싶어서
이글루스를 버리고..ㅋ 티스토리로 옮겼다~
놀러오삼~^-^
선미 2009/09/18 17:07 # 삭제 답글
아.. 정말 맞는 말을 쓴 레포트구나..ㅋㅋ 너의 저 훌륭한 외침이 윗딱지들 귀에 좀 들어갈 수 없느냐;; 그리고 좀 바뀔수는 없을까 ㅠㅠ 진정!!!헐 2009/10/17 10:28 # 답글
구구절절 옳구나. 오랫만에 이글루스 들어와서 좋은 글들 잘 읽다가 간다.지요 2009/11/10 14:36 # 삭제 답글
교육환경부터 개선이 되야겠죠?
현명한 선생님들이 많아지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좋은 선생님이 되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