듬성듬성 여러 매체들에서 그의 글을 읽었다. 나는 사람 이름을 참 기억 못하는 편인데 웬 글을 읽다 이거 참 나랑 비슷하다 싶어 글쓴이를 살펴보면 그인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래서 겨우 기억하고, 책을 하나 사 보았다.'B급 좌파'는 좀 들어보았는데 예전 책이라 그래도 최근 책인 '나는 왜 불온한가'를 골랐다. '예수전'은 종교적인 색채가 강할 것 같아 그만두었는데, '나는 왜 불온한가'에서 드러나는 그의 종교관을 보면 '예수전'을 보았어도 좋았겠단 생각이 든다. 동의하든 않든, 혁명가로서의 인간 예수는 매력적인 해석이다.
2001년부터 2005년까지 그가 여러 잡지에 기고한 글과 아마도 블로그에 써서 올린 것일 그의 일기가 묶여져 있다. 당시에 있었던 여러 굵직한 사건들과 그에 대한 그의 좌파적 관점을 읽을 수 있다. 저 시기는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와 겹치는데 당시 대학에서 논의되던 여러 문제들이 좌의 편에서 논리정연하게 다듬어져 있어 혼란스러운 채 미봉되었던 논제들을 정리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이를테면, 故 노무현 전 대통령과 관련한 것들과 시민운동에 대한 것들. 나는 내 생애 첫 선거에서 내 손으로 그를 뽑았고 뿌듯해했고 그리고 실망하고 질타하고 나중엔 잊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맞이한 죽음. 넘치는 그에 대한 추모 열기 속에서 나 또한 슬펐고 또한 불편했다. 책을 읽으며 당시 그의 어떤 한계 때문에 그에 대한 지지를 거두었었는지 되짚을 수 있었다. 장점만큼 단점도 가진 대통령이었고 의의 못지 않은 한계도 남긴 대통령이었다. 뭐, 지금 한가지 분명한 건 그를 대신한 누군가의 자리가 무척이나 못마땅하다는 것이지만.
시민운동, 혹은 개혁운동이라 불리는 것들도 다시금 생각을 정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모든 시민운동이 그러하다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때때로 일부 시민운동을 보면 욕망의 분출구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민운동뿐 아니라 때로는 일부 시위들도. 개인 혹은 집단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움직임들. 그것들에도 운동이란 정의를 내릴 수 있을까, 의문이 들곤 했었는데 그의 글에서 의문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생각해 보라. '이미 시민인 사람'이 무엇 때문에 세상을 바꾼단 말인가. 그들은 단지 좀더 편리한 세상을 바랄 뿐이다. 그들의 주식이 제값을 받기를, 그들의 핸드폰 사용료가 좀더 적절하기를 말이다. 세상은 세상을 바꿀 이유가 있는 사람들, 제 정직한 노동으로 세상을 움직이면서도 여전히 억압과 경멸에 처한 사람들, 세상이 달라졌다는 주장을 도무지 실감할 수 없는 사람들이 바꾼다.
이에 더해 소위 386이라 일컬어지는 무리들, 소위 지식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에 대한 그의 비난은 무척이나 신랄하다. 혁명이 아닌 개혁을 말하며 현 체제를 안존하도록 만드는 주범이자, 현학적인 지식 나부랭이들로 혹세무민하는 밥버러지쯤으로 묘사된다. 자신 또한 386세대와 같은 시대를 살았으며 지식인이자 글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칼날을 들이대는 것은 지독한 자기 검열이자 일종의 지사적 결벽성이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들에 대한 비난은 동시에 그 자신에 대한 반성과 채찍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의 비난이 과한 감이 없지 않다 여겨지면서도 그를 편들게 한다. 세상에는 그와 같은 결벽주의자도 필요하다. 조금의 티끌도 용납하지 못하는 순결성이야말로 어쩌면 혼탁하게 물들어가는 진보의 마지막 보루일 거다.
하지만 그의 이런 근본주의적(?) - 적절한 용어가 따로 있는지 모르겠다. 여튼 지극히 좌에 편향된- 생각들에 납득이 힘든 지점도 물론, 있다. 무지개를 색에 따라 7부분으로 정확하게 구분하기 어렵듯이,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장단점이 있었듯이, 개혁운동에도 나름 의미가 있고, 논평자들과 밤의 대통령들 중 일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극심한 빈곤에 허덕이는 극빈 계층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가 무척이나 혐오하는 키보드 워리어들 중 상당수는 그가 그토록이나 절실하게 진보운동으로 끌어들이고자 애쓰는 젊은이들과 겹칠 것이다. 적과 동지, 흑과 백이 분명한 그의 사고는 온당하지만 석연치 않다. 에누리 없는 그의 철저한 진보사관은 결연한 믿음을 주지만 동시에 그처럼 철저하기 힘든 사람들이 같은 편에 서는 데 주저하게 만든다. 그의 편애 없는 칼날이 가차없이 목을 칠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그는 완고하고, 어떤 의미로 보수적이다. 당연한 것이지만 그는 '진보'의 경계가 흐려지는 것에 질색한다.
또한 그의 이상주의는 지극히 비현실적으로도 보인다. 그는 '역사가 보여주듯, 세상은 '꿈을 꾸는 사람들'로 바뀐다'고 했지만 사실 세상은 제 욕심을 차리고자 하는 사람들의 편의대로 변해 온 것인지도 모른다. 중세의 암흑기를 끝낸 것은 농노들이 아니라 부르주아 아니었던가.
게다가 그가 보이는 몇몇 관점은 나를 불편하게 한다. '마리아의 기억'은 운동권 판으로 변형된 남성적 판타지 같고, 그의 아내가 그를 형이라고 부르는 호칭도 나에겐 이상하게 들린다. 지나치게 딸의 정신무장(?), 사상무장(?)에 민감한 것도 역설적으로 그의 자연스럽지 못한 여성관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뭐, 예민하지 못한 마초들보다야 백배 낫지만.
책을 읽고 최근 그의 근황을 살펴보니 소위 글 좀 쓴다는 진보적 젊은 글쟁이들에게 '디 워' 사태로 점수를 좀 깎인 모양이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그가 어떤 견지에서 디 워 옹호세력 편에 섰을지 나름 짐작할 순 있겠다. 소위 비평가라는 세력의 대중들에 대한 질책이 마땅찮았을테다. 덕분에 꼰대 소리를 좀 듣는다는데, 예술을 예술 자체로만 평가하려는 입장과 예술과 그것을 향유하는 대중의 정서를 포괄하려는 입장 사이의 헤프닝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 나는 디 워 자체에 관심이 없어서 둘러싼 담론에도 좀 무관심했는데, 글쎄, 그 사건 하나로 그 자체를 폄하하는 것도 오바같다. 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그렇다.
그는 싸늘하게 말하고, 동시에 격정적으로 외친다. 그의 글은 내게 동조와 동시에 자책을 이끌어낸다.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이만큼 살았으면서도 헤매고 있는 나에게 그는 다음처럼 분명하게 말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밑바탕에 전제하고 있는 한 기꺼운 마음으로 나는 그를 지지할 수 있을 듯 하다.
'다른 세상'을 꿈꾸는 일의 출발은 '다른 가치관'을 갖는 것이다. '네놈들이 잘 먹고 잘 살았으니 우리도 한 번 잘 먹고 잘 살아 보자'라는 생각은 고통스런 삶을 사는 피억압자에게 정당한 것이지만 그게 혁명의 전부는 아니다. 혁명은 단지 '급격한 역할 교환'이 아니다. '한 줌의 지배계급이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에 대한 혁명은 '한 줌의 지배계급이 차지하던 것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남보다 잘 먹고 잘 사는 일 자체를 부끄러워 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혁명의 최종 목표는 '가치관'을 바꾸는 것이다.
+ 한참 전에 읽은 것을 글쓰기 싫어 미루고 미루고 했는데 그 사이 또 한 사람의 대통령이 영면했다.
미용실에서 파마를 하면서 접한 서거 소식은 놀랍고 비통하기보다 그저 덤덤했다.
한 시대가 가고 있다.
at 2009/08/31 21:23


덧글
선미 2009/09/18 16:54 # 삭제 답글
밑에 볼드체로 적힌 글귀가 참 와닿는구만... 좀 딴쪽으로 새서, 요새 볼보주의나.. 스웨덴의 사회 복지주의.. 기타 등등 이런거 좀 보는데, 가치관을 바꾼단 말이 참 와닿는다. 비록 그네들은 side effect에 시달리다 돌아서려 하지만서도..; 그래도 역시 사회를 바꾸는 것은 생각을 바꾸는데 달린 것 같다. 아웅 요샌 건희한테 몰두하느라 책 읽을 시간도 잘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