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입되어 있는 카페에서 이벤트를 하길래 신청했더니 국제도서전 입장권을 보내주었다. 그래서 비가 갑자기 억수같이 쏟아붓던 날, 친구들을 만나 코엑스에 갔고, 사람이 너무 많아 질려버린 나머지 발길을 돌려 영화표를 끊었고, 토요일 저녁인지라 자리가 없어서 우리 셋은 멀리 떨어져 각자 영화를 보았고, 그래도 만남의 목적은 도서전이었던 지라 문닫기 직전 아주 잠깐 돌아보고 나왔다. 그리고 거기서 샀다. 삼천원 줬던 걸로 기억한다.작품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연애소설 읽는 노인', '파타고니아 특급열차' 소개가 인터넷 서점에 꽤 오랫동안 걸려 있었기에 작가 이름은 익숙했다. 한번쯤 읽어 보고 싶었고, 마침 가격도 착했고, 단편집이라 실패 부담도 적을 것이기에 짧은 시간에 망설임없이 선택했다. 많은 책을 싸게 구입할 좋은 기회였는데, 아쉽다. 다음 도서전엔 전투적으로 임해야지.
칠레 작가인 루이스 세풀베다의 절판 혹은 미발표된 27편의 단편들을 모은 책이라 한다. 꽤 다양한 내용의 단편들이 실려 있는데 독특한 환상문학(누가 남미 작가 아니랄까봐)에서부터 찌뿌듯한 유럽 날씨같은 소설들, (아마도) 칠레 역사를 배경으로 한 다분히 풍자적인 작품들까지 골고루 섞여 있어 읽는 재미가 있다.
27편이나 되는 이야기들을 '외면'이란 책 제목에 걸맞게 '사람들을 외면하다', '자신을 외면하다', '흐르는 시간을 외면하다', '사랑을 외면하다'의 네 꼭지로 구성해 놓았다. 묶어놓은 단편의 내용이나 주제에 걸맞게 꼭지 제목들을 정한 듯 한데 다만, 첫번째 '사람들을 외면하다'는 어째서 '사람들'인지 잘 모르겠다. 독특한 환상성을 가진 작품들을 모아놓았는데, '사람들'이라... '실제 사람들이 사는 현실'을 외면하다란 뜻으로 해석해보면 의미가 통할지도.
이 꼭지의 작품들은 모두 흥미진진했는데 특히 '탈선'의 반전이나 '울고 싶어도 울 데가 없을 때'의 기막힌 해결, '자동응답기'의 서늘한 여운이 인상적이다. 그 중 '울고 싶어도 울 데가 없을 때'는 울 수밖에 없게 만들어 주는 마마 안토니아의 절묘한 기술에 경의를 표해야 할지 역겨움을 느껴야 할지, 절대 다시는 울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 주는 그 괴상한 행위, 그 황당무계한 해결책에 울고 싶다가도 피식 웃게 만드는 아주 기가찬 이야기였다.
'자신을 외면하다'의 세 단편은 지나치게 짧았고 그닥 기억에 남지 않는다. 희뿌옇고 축축한 분위기만 떠오른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그나마 공감이 갔다.
'흐르는 시간을 외면하다'의 경우 인상적인 작품들이 몇 있었으나 칠레와 남미 역사에 무지한 고로 이해가 선뜻 되지 않았다. 학생 운동을 하다 망명한 작가의 이력답게 칠레의 독재상황과 그에 대항한 세력들을 다루고 있는 듯한데 배경지식이 짧은 것이 참으로 아쉽다. 그나마 '톨라의 기록'이나 '사서'는 비교적 쉽게 이해되었고 이야기가 가진 문제 의식도 와닿았다. 짧은 분량안에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 절망적이지만 그래서 더 찬란한 희망을 이야기 하는 '톨라의 기록'은 꽤 묵직했다. 그리고 다분히 상징적이며 (아마도 틀림없이) 보르헤스풍의 뻥이 섞인 '목소소목의 하얀 미로들'의 도서관도 매력적이었다.
마지막 '사랑을 외면하다'는 말 그대로 사랑이야기들. 헤어짐, 그리움, 안타까움, 망설임 등등의 감정이 짧은 단편들 안에 담겨 있다. '전장에서의 밀회'가 보여주는 사랑의 고약함, '솔로르사노 부인에 대해 말해 주마'가 말하는 사랑의 아득함. 짧은 단편이라 더 강렬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다.
그리고 하나 더. 사실 이 책은 네 개의 꼭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 더 있다. '하늘의 또 다른 문'이란 이름으로. 같은 제목의 단편을 마지막으로 책을 끝맺고 있는데 이게 또 엉뚱하다. 북유럽 전설 속의 식인귀, 오그로를 등장시켜 인간과의 기묘한 교통을 그리고 있는 이야기. 현실적이면서 또 다분히 비현실적인 이 이야기를 통해 남미 특유의 매직 리얼리즘을 재확인하며, 살면서 언젠가는 한번쯤 마주쳤을 법한 외면의 순간들, 그러나 또한 결코 겪어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 분명한 그 순간들에 대한 탐색을 마무리하게 된다.
남미 작품들의 독특한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는 단편집. 남미 역사와 문화에 대해 공부 좀 해야겠다. 킁.
at 2009/09/18 00:25


덧글
Kenji 2009/09/19 16:45 # 답글
(경미임'ㅅ')v )어디에다 안부를 전해야되는걸까 번번히 고민하며 서성이다 돌아갔는데 그냥 "안녕"인사해도 되는 포스팅은 좀처럼 없구나 친구 ㅎㅎ이러저러해서 백수 청산하고 복직하게 됐다고 보고 하러왔다 ㅋ
늙은 이몸은 놀아봐야 반짝 좋아지지도않고 이대로 다시 복직하는게 바른 선택이었길 바랄뿐
할 일이 구만리를 늘어서 있더라도 늙은이는 건강이 첫번째임을 잊지 말게 친구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