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것도 여름에 연수 받으러 오가며 읽은 책. 연수 장소까지 무려 2시간 가까이 버스, 지하철,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다닌 까닭에 책 읽을 시간이 많았던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강의 듣는 중엔 책 읽는 걸 자제했음에도 연수 성적이 바닥인 걸 보면 확실히 좋은 머리는 아니다. 어쨌거나 알찬 독서를 한 여름이었다.
권정생 선생님이 '강아지똥', '몽실언니'의 작가라는 것을 안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알았대도 별 다를 것은 없었을 거다. '몽실언니'는 예전에 드라마로 언뜻 '보았다'라는 행위에 대한 기억만 남아 있고 '강아지똥'은 오히려 싫어했으니까. 나는 이상하게 우리나라 착한 동화들이 싫더라. 하얗고 순결하고 순수하고 선한 것들의 세상.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것이라 여겨지기에 더욱 작위적인 것 같고 그래서 막 더럽혀 버리고 싶어진다. '강아지똥'이란 동화가 꼭 저랬다. 보잘 것 없는 똥덩어리가 결국 민들레 하나 피워내는 과정, 자기 희생을 통한 새로운 생명의 창조. 아, 너무나 구태의연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 수록 그 흔하고 평범한 가치들이 얼마나 중요한 것들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너무 뻔하고 흔해서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게 된 것들, 선량하고 약한 것들, 풀씨 같이 가볍고 개울 같이 낮은 것들, 작지만 서로 나누고 소박하게 즐거워하는 것들. 그 모든 존귀한 것들.
'우리들의 하느님'에는 그 모든 게 다 있다. 때론 강경하고 때론 날카롭게 벼려져서. 제목 때문에 종교적인 수필집일 것이라 생각했고, 실제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성서 읽기'라는 강좌를 들으며 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에 때문에 이 책을 펴들기도 했지만 책은 단순히 종교만이 아니라 신과 자연과 인간들이 조화롭게 또한 매우 투쟁적으로 얽힌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종교인이지만 종교에 함몰되지 않고 아동문학작가이지만 그의 동화는 슬픔의 눈물을 머금고 있다. 삶에 대한 올곧은 시선과 그 자세 그대로 살아나간 생애. 수많은 지식과 사상과 언설들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살아낸 실천적 삶 앞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을테다.
책은 권정생 선생님이 여기저기 실었던 글들을 힘겹게 모아 묶은 것이라 한다. '소유'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던 그 분은 자신이 쓴 글들조차 모아놓지 않을 정도여서 편집하는 사람들이 애를 먹었다 했다. 간략한 자신의 삶을 소개하는 것에서 부터 기독교와 하느님, 예수님에 대한 생각, 동네 사람들의 삶, 농촌의 실상과 앞으로의 방향, 민족과 통일, 전쟁과 평화에 이르기까지 진폭을 달리한 다양한 생각과 고민들이 담겨 있다. 그의 사고는 다분히 원론적이며 지극히 이상적이다. 마치 종교서적에 쓰여진 말들처럼. 모든 생각에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놀라웠던 것은 그의 생각이 매우 전위적이고 소위 좌경적이었으며 무엇보다 그것을 직접 실천하며 살았다는 것이다. 말보다 앞서 행동으로 살았기에 그분이 남긴 글들이 더욱 가슴을 찌른다. 글 하나하나 아주 쉽고 살아 있는 이야기들이라 마음에 남았지만 특히 기억에 남는 구절을 뽑아본다.
기독교가 있든 없든, 교회가 있든 없든, 하느님은 헤일 수 없는 아득한 세월 동안 우주를 다스려왔다. 선교사가 하느님을 전파하면 하느님이 거기 따라다니며 머물고 같이 사는 게 아니라,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부터 하느님은 어디서나 온 세계 만물을 보살펴 오셨다. 하느님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인간들의 마음이다. 종교는 하느님의 섭리에 따르려는 의지이지, 종교가 요구하는 대로 하느님의 섭리를 바꾸는 게 아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바로 자연의 섭리가 된다. 하느님은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분이 아니라 스스로 계시는 분이라 했다. 그러니 하느님은 곧 자연인 것이다.
진정 이 땅의 농촌과 농촌교회를 걱정한다면 좀더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삶이 있어야 한다. 나는 신학(神學)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지만 올바른 신학을 한다면 농학(農學), 인간학, 자연학을 함께 공부해야 한다고 본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는 추상적이며 관념에 머문 신학을 가르치지 않았다. 입으로 설교하는 목회가 아니라 몸으로 살아가는 목회자가 있어야 한다.
교회를 딱 1년 다니고 그만둔 선영이네 할머니는 요즘 예순다섯의 나이로 연탄불살개 공장에 다니신다. 아침 6시반에 가서 저녁 8시에 돌아오신다. 하루 품삯이 1만2천원이다. 고달프다는 말보다 부끄러워 검정투성이 옷을 남몰래 밤에 개울에 가서 빤다고 하신다. ... 올해 가장 돈을 많이 번 어느 연예인은 하루에 백만원꼴로 벌어들였다. 참말인지 믿기지도 않는데 신문에 그렇게 나 있으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어떻게 되었기에 그런 사람은 하루 백만원을 쉽게 벌고 예순다섯살의 할머니는 열두 시간을 검정숯가루를 뒤집어쓰며 일해도 1만2천원인가? 나는 단돈 1만2천원이 적다는 것이 아니라 백만원이 너무 많다는 주장이다. 직업은 달라도 품삯은 같아야 한다. 성서의 예수님은 그렇게 가르쳐주셨다. 설령 그 연예인이 불살개 숯을 만드는 할머니보다 백배 가치있는 일을 하더라도 결코 그 가치를 돈으로 구분지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우리가 믿는 것은 죽은 다음의 천국보다, 그리고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이기 이전에, 예수의 삶과 죽음에 대한 정신이다. 그가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죽었는가가 훨씬 더 중요하다. 만약 예수가 이 세상에서 참되게 살지 못하고 참되게 죽지 못했다면, 그의 동정녀 탄생이나 죽은 뒤 사흘 만에 부활한 것도 지금 하느님 오른 편에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는 것도, 모두가 값어치 없는 일이다. 예수는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이 세상에서 살았다. 언제 어디서 살았든 간에 다만 살았다는 것, 그가 짧은 일생을 사람답게 살았다는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예수가 필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의 사상은 무소유, 무계급, 무정부의 세 가지가 갖춰진 나라였다. 그 나라는 국경도 인종차별도 없는 나라다. 모두가 한 형제이며 평등하다. 아무도 다스리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법칙대로 사는 나라이다. 그 나라가 이루어지는 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다만 너희는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했다. 말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삶을 살라고 했다. 무소유, 무계급, 무정부, 그래서 이 세상 왕의 말은 듣지 않아도 하느님의 뜻대로 살라고 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고 하느님게 감사하고, 대학입시에 수석 합격했다고 감사하고, 복권에 당첨되었다고 감사하고, 취직되었다고, 병 고쳤다고, 외국산 전기밥통을 선물로 받았다고 감사하고, 승진되었다고 감사하고, 시집 잘 갔다고 감사하고, 이런 감사는 모두가 이기적인 감사다. 내가 금메달을 따면 못 다는 사람이 있고, 내가 수석을 하면 꼴찌한 사람이 있고, 내가 당첨되면 떨어진 사람이 있고, 내가 잘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못되는 것을 생각하면 어찌 기뻐할 수 있겠는가. 그런 감사를 하느님은 절대 기뻐하지도 바라지도 않으신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책의 마지막을 읽었다. 평소 귀감으로 생각하고 있던 이계삼 선생님이 마지막 마무리 글을 쓰셨다. 권정생 선생님 타계 1주년을 기념하여 새로 발간한 것이라 책의 앞이고 뒤고 이런저런 추모글이 덧붙여져 있다. 사족같아 보일 수도 있으나 그 분의 삶을 더욱 이해하는 계기가 되어 나로선 정말 좋았다. 그리고 슬프고, 감사하고, 또 슬펐다. 세상 모든 것을 위해 아파하고 기도했을 그 마음에 공감하여 슬프고, 그래도 이런 삶도 있다 몸소 보여준 그 분의 삶에 또한 감사하고, 한편으론 그처럼 살 수 없을 내 한계에 대한 자각으로 걷잡을 수 없이 슬펐다. 그 모든 감정이 뒤섞여 나는 좌석버스 뒷자리에 파묻혀 마구 울었다.
성서에 관한 강좌를 들으며 우리나라 기독교의 기복신앙, 인과응보적 성격에 대한 많은 의견이 오갔다. 강의하신 손기태 선생님은 선한 일을 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선하게 사는 삶, 그 자체가 복이라고 했다. 가난하고 불편하고 때론 위험할지라도 선하게 사는 삶, 예수의 말씀 그대로 사는 삶, 그 자체가 축복받은 삶이며 은총이라는 것. 바로 그 자리가 천국이라는 것. 권정생 선생님은 천국을 사시다 가셨다고 믿는다.
애국자가 없는 세상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도
애국 애족자가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젊은이들은 나라를 위해
동족을 위해
총을 메고 전쟁터로 가지 않을 테고
대포도 안 만들 테고
탱크도 안 만들 테고
핵무기도 안 만들 테고
국방의 의무란 것도
군대훈련소 같은 데도 없을 테고
그래서
어머니들은 자식을 전쟁으로
잃지 않아도 될 테고
젊은이들은
꽃을 사랑하고
연인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무지개를 사랑하고
이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결코 애국자가 안 되면
더 많은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 것이고
세상은 아름답고
따사로워질 것이다.
at 2009/10/07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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